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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소녀 보이스 드라마가 나온 기념으로 올려봅니다.


자전소녀(自轉少女)


사람은 누구나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고, 지금 이 순간이 그렇지 않다면 ‘특이한 일’이 일어나 자신의 인생이 바뀌길 바란다.

그런 환상을 쳐부숴주마!

결론을 말하자면 그런 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등교 길 골목 모퉁이에서 식빵을 입에 문 채 ‘지각이다. 지각.’이라며 달리는 소녀와 부딪치고, 팬서비스 차원의 팬티를 본 후 다투고, 나중에 같은 반에서 만난다든가.

예를 들어, 당신은 전설의 용사의 후손입니다. …라는 아침드라마 같은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는 미소녀와 만난다든가.

예를 들어, 옆집에 사는 소꿉친구가 학교가자고 깨우러 와주는 아침을 맞이한다든가하는 것 말이다.

어쩌다 보니 미소녀 게임을 예로 들었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 현실을 사랑하지 않고, 특별함을 바라는 사람은 커서 ‘완전 폐품인 아저씨’나 아줌마가 된다고 경고하겠다. 그런 현실을 인정 못하는 사람들이 금발 트윈테일 소녀 베개를 끌어안고 ‘우린 연인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정신 이상자가 되고 만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 자신도 여기에 속한다.

내게 특이한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길 바라지도 않고, 그저 지금을 무덤덤하게 살 수 있으면 만족한단 말입니다!

그런 신조를 가진 내게… 지금 약간의 위기가 찾아왔다.

나는 요새 미묘한 시선(視線)을 느끼고 있다.

등·하교 하는 도중, 수업시간이나 야자시간의 교실, 점심시간의 식당, 체육시간의 운동장 등등 모든 곳에서 말이다.

하루 종일 어디 있는 지를 설명하니까 전부 학교가 되는 슬픈 현실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자. 어쨌든 간에 집이 아닌 모든 곳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러니까 새로운 학교생활에 접어들면서 벌써 한 달간 계속 이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또냐….’

일부러 선택한, 사람이 별로 없는 이른 아침 등교 길. 오늘도 누군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확실히 알았다.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은….

‘서유리….’

분명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같은 반임에도 한 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 없는 소녀. 그러나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서유리. 시드 고등학교 1학년 3반. 밤색 단발머리에 작은 체구. 단아한 이목구비에 무표정한 모습은 소란스러운 또래 여고생과 비교하면 확실히 특이한 유형이다. 손에는 문고판 책을 읽으며 걷고 있고, 늘 책을 손에서 떼지 않기에 별명은 ‘문학소녀’다.

다만, 책을 너무 좋아하는 탓인지 사교성은 제로다. 지금도 소수이긴 하지만 등교하는 학생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따로 걷고 있다.

나와의 거리도 약 20m 정도로 꽤 되지만, 분명 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은 서유리였다.

‘어째서?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다름 아닌 서유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설마… 그런 전개인가? 아니, 내게 한에서 그런 일이 있을 리가…!’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이 전개는 마치 소심한 소녀가 짝사랑하는 상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로맨스 소설의 그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내 운에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 특이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단 말이다!

* * *

-퍼퍽!

“커헉!”

분노에 찬 일격이 나를 덮쳤다. 너무 기습적으로 당한 탓에 방어할 틈도, 마음껏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당해버렸다.

나를 때린 상대는 두 주먹을 쥐고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소리쳤다.

“내가 사람을 때린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일어나, 한시영!”

“너… 무슨 짓이야, 이 자식아?!”

나는 벌떡 일어나서 녀석의 멱살을 잡았다. 하지만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서유리가 너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하? 바보냐? 병신? 등신? 마음에 드는 걸 골라라!”

“…하지만.”

“어쩌다가 동급생 여학생의 시선이 스쳐지나간 걸로 착각하지 말란 말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유리라고? 사교성 0에 모든 사람들이 말을 걸어도 쿨하게 무시로 일관하는 그 애?! 물론, 그래도 그 애는 귀엽지. 노리는 놈들도 제법 있다.”

확실히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기 초반에 유리에게 관심을 가진 남학생들이 말을 걸었으나, 유리는 머리카락하나 반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겉모습만 보자면 확실히 수준급이긴 하기에 아직도 어느 정도 인기는 지속되고 있는 모양이다.

아니, 근데 그보다… 그것과 내가 맞은 것을 토대로 추리해보면….

“…설마 너도냐?”

내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묻자 잠시 침묵이 일더니….

-퍼퍽!

“으앗?! 이 자식! 또 쳤겠다?!”

“내가 사람을 때린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난 그만큼 지금 화가 몹시 나있어!”

“왜 횟수가 줄어든 거냐! 쓸 데 없이 멋진 대사 만들려고 하지 마!”

녀석의 이름은 김기웅.

보시다시피 이런 성격인데다가, 이런 관계이기에 ‘친구’라는 단어를 쓰면 국어사전에 실례가 되므로 ‘오랜 악우’정도로 하겠다.

말하긴 좀 그렇지만, 친구가 많지 않은 탓에 이 녀석에게 유리에 대한 일을 상담했더니 이런 결과가 되었다.

“너, 너의 자의식 과잉이다. 유, 유리가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지켜보고 있는 건 사실이야. 벌써 한 달 째라고.”

나는 단호하게 사실을 말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쿨럭. 쿠허헉. 나는… 쿠헉!”

“야, 각혈할 정도로 상상하는 것조차 괴롭다면 그만 둬!”

나는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는 기웅을 살폈다. 뭐가 어쩌니 해도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 녀석에 비하면 나는 충분히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각혈은 어떻게든 진정된 모양이다.

“후우. 큰일 날 뻔 했군. 역시 믿지 못할 얘기야. 너는 남중 남고 출신에, 특별히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밋밋한 망캐(망한 캐릭터)잖아.”

“작작하시지.”

기웅은 나를 깎아 내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화가 풀려, 냉정해지기 시작한 모양인지 안경을 고쳐 썼다. 물론, 일부러 가운데 손가락으로만 안경을 올려 내게 엿 먹으라는 제스처를 잊지 않는 녀석이다.

“…하지만 네가 유치한 거짓말을 할 놈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

“…고맙다고 해야할 대목이냐.”

“그래도 시선이 신경 쓰인다면, 오늘 수업시간부터 내가 철저히 유리를 도촬… 관찰 해주겠어.”

“너 설마 진짜로 도찰하려는 건 아니겠지?”

“간다. 이번 수업시간에 유리의 일은 내게 맡겨. 우정을 위해 나는 기꺼이 도촬… 관찰을 하겠어.”

“카메라는 치워.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지?”

“친구를 착각의 늪에서 구해주는 것도 친구의 역할. 내가 전심전력으로 도와주마.”

“잘도 친구라는 단어를 쓰는군. 국어사전에게 사과해.”

결국에는 별 소득은 없이 수업시간 시작 종이 쳤다.

확실히 말해서 내 착각일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순 없다. 눈을 마주친 적도 없고, 심지어 모순되었지만, 유리가 책을 보고 있을 때도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 직전.

다 알겠지만, 한국의 고등학생은 수업 종이 치고 5분 후에야 정렬이 가능하다. 흡사 세기말의 비명과 가까운 수다소리가 가득하고, 반 분위기 자체는 혼돈의 카오스다.

다만, 우리 반은 조금 얘기가 다르다.

“자, 이제 그만. 모두 자리에 앉자. 종쳤어.”

한 소녀의 말에 통제 불능의 야생마 같은 고등학생들이 태도를 바꾸었다.

“응. 알았어. 세린아.”

“다음 시간은 뭐였지?”

“큰일이야. 태섭이가 아직 안 들어왔어.”

“추격조를 편성해. 세린이가 불렀다고 해.”

“총통. 추격조 3명과 태섭이를 제외한 전 인원 착석했습니다.”

“국어 선생님이 들어올 예상 시간은 1분 20초야.”

“올 하일 윤세린!”

부드러우면서도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지닌 반장–윤세린 때문이었다. 전형적이라고 해야 할까… 성숙한 몸매에 비단결 같은 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린 세린은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결단력 있는 아이였다.

더 대단한 점이 있다면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마냥 좋은 사람으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고 있다는 것. 아마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대통령이 나온다면 분명 세린이겠지.

“자. 그럼 수업준비 하자. 모두, 교과서는 충분한가?”

“충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어 세린교(敎) 신자가 되어 착실히 수업준비를 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딱히 신자는 아니어도 거역할 이유는 없으니까 따른다고 할까? 교과서를 꺼내고… 슬쩍 창가 쪽 맨 뒷자리-유리의 자리를 돌아보았다.

‘…응?’

유리는 책을 들고 있지만… 그것은 교과서가 아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책 크기부터 모양까지… 확실히 다르다.

그리고 세린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면서 유리에게 다가갔다.

“유리야.”

자신감 있고 청아한 목소리로 유리의 이름을 부른다. 동시에, 자연스럽게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교과서는 어디 있어? 없니?”

“…….”

유리는 보통 반 애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태도. 즉, 침묵으로 무시했다. 마치 주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다는 듯이 책만 읽고 있었다.

“저기, 유리야? 곧 수업 시작하니까….”

“…….”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역시 침묵뿐. 반 애들은 술렁술렁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아마 교주인 세린의 말에 건방지게 대답하지 않는 유리를 비방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위험하다. 아직까지는 아니었지만, 반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유리)는 자칫하면 왕따가 될 가능성도 있다.

괜스레 내가 불안해진다.

그때, 세린이 활짝 웃으면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맞다. 교과서 내가 빌렸었지! 잠깐만, 여기 있어. 미안, 미안. 요새 내가 건방증이 심해서…. 교과서 안 가져온 건 나였는데.”

세린은 미안하다는 듯이 혀를 살짝 내밀고 사과했다. 그리고선 자신의 자리에서 책을 집어 유리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그 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풀렸다.

“내 세린이가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똑똑한데 저런 맹한 점도 좋아.”

“유리도 세린이가 곤란해 할까봐. 말 안하고 있던 거겠지?”

…축약하면 이런 분위기로 반 아이들끼리 술렁대기 시작했다. 때마침 선생님이 들어오면서 사건이 무사히 종결되었다.

‘뭐야 그랬던 건가?’

나는 어쩐지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내 옆에서 기웅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교과서는 세린이 거야.”

“응…?”

“내가 유리의 교과서가 어떤 건지 모를 리가 없잖아. 저건 분위기를 바꾸려고 일부러 한 거야.”

“…과연. 그런 거였나?”

자신의 교과서를 넘겨주고, 마치 자기가 안 가져온 것처럼 행동했다. 속이 깊다고 해야 할까? 자칫 소외될 수 있는 유리를 위해 간단한 거짓말로 반 전체를 속인 것이다. 물론 허술하다면 허술하지만, 세린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반 아이들은 모두 그녀의 말을 믿었다.

‘무지막지할 정도로 좋은 녀석이군.’

이런 상태로 한 달이나 되었는데, 유리에게 큰 적대감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세린이 잘 컨트롤 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한편, 유리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 진 세린의 교과서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감정이 잘 들어나지 않아 고마워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곧 이어. 나는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유리는 세린의 책을 집어 들더니….

‘……!!’

창문 밖으로 손을 뻗어 버려버렸다.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아마도 나와 기웅이만 봤을 것이다.

“어이, 어떻게 생각해?”

내가 작게 기웅이에게 물었으나 녀석은 생각에 잠긴 채 묵묵부답이었다.

왜인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물론, 그 물음의 답을 낼 수는 없겠지만.

신경 쓰인다. 무지 신경 쓰인다.

유리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세린에게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요컨대, 세린은 좋은 녀석일 거다. 남몰래 유리를 돕고 그것을 생색내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건 딱 질색인데.’

쉬는 시간, 장소는 옥상. 나와 기웅은 유리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 김기웅. 뭔가 정보 없어? 둘이 사이가 안 좋나?”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애초에 세린이라도 유리한테는 별로 접근하지 않는다고. 접근한다 해도 유리쪽에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게 다였고, 이런 경우는 처음이야.”

결국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거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확실해.”

갑자기 기웅이 결연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지금 해야 할 일?

“너, 한시영! 지금 이후로 유리에게 관심 끊어!”

“…느닷없이 뭔 소리야.”

“네 신조를 지키란 말이다. 유리는 이 몸에게 맡기고. 넌 그냥 망캐로서 나를 보좌하는 엑스트라 역할을 하라고.”

생각해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유리와 세린의 사이가 어떤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신경 쓰이는 건 유리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유리가 널 지켜보고 있는 이유는 내가 조만간 알아내서 보고해 주지.”

“…그러냐?”

그렇다고 해도 이 녀석은 좀 오버하는 경향이 있다. 녀석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리라는 아이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데 말이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네가 유리랑 가까워… 가, 가까워진다면… 쿨러어어어어억!”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생각해! 이 멍청아 진짜로 죽어!”

뭐가 어쨌건 엄청나게 각혈을 해대는 기웅 때문에 일단은 신경 끄기로 했다.

그래 조금만 참자. 뭐가 어쨌든 녀석은 이런 방면(?)으로는 도가 튼 녀석이니까, 어떻게든 유리에 대한 걸 조사해서 알려주겠지.

“지, 진짜지? 유리는 포기… 쿨럭.”

“알았다고!”

OK. 알았다. 대신 모든 걸 맡긴다.

지금부터 나는 늘 그렇듯이 달관의 경지에 들어서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살겠다.

‘신경 쓰지 말자. 평소처럼 살아가자고, 한시영.’

나는 나 자신을 세뇌하듯이 중얼거리면서 복도를 걸었다.

그러던 찰나.

복도 반대편에서 한 소녀, 녹색 머리띠와 손에든 책이 트레이드마크인 그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시 말해 무엇하랴?

바로 서유리였다.

‘우왓! 딱 마주쳤다!’

작은 보폭으로 걸어오는 유리. 신경 쓰지 않겠다고 했으나 오늘은 평소와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처음 마주하는 그 눈이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고 해야 할까… 아님 두려웠다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녀의 분위기가 평소와 좀 달랐다는 것이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곧, 내 뇌 속에서는 여러 명의 내가 비상회의를 시작했다.

-그냥 동급생이잖아. ‘여어~’라고 인사하고 지나쳐.

-무리야! 나한테 그런 상큼한 캐릭터는 무리라고!’

-‘그대가 나의 마스터인가?’는 어때?

-갑자기 복종 플레이를 해서 뭐하게! 게다가 성반전이잖아!

-진실을 말하면 유혈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아니. 말 안 해도 일어나지 않아.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모두 닥쳐. 쓸 데 없는 것들… 제독! 결정을!

내 마음속에 제독은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시하는 거다!

OK. 그걸로 가자.

나는 그렇게 결정하고 입을 굳게 다문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와 가까워지고… 이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좋아. 성공이야!’

그때, 아주 작게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어.

“……?”

유리가 무언가를 말했다.

아주 작은 목소리지만 분명 무어라고 말했다. 아무에게도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는 그녀가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추었다.

서로 지나쳐 약간 등을 돌린 상태. 유리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

알고 있다? 무엇을? 뜬금없는 말에 나는 유리를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뭘?”

그리고 그녀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내 물음에 답했다.

“난… 네 비밀을 알고 있어.”

“……?!”

무표정인 얼굴로 그녀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고? 물론 그런 게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내 머릿속 물음에 답하듯 그녀가 말했다.

너, 초능력자지?”

……

…………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런 나를 보고 유리는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새 네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아니요. 잠깐만요. 그건 제 쪽의 대사입니다만?!

한 달 동안 내 등이 뚫어져라 쳐다본 건 네 쪽이라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워낙 혼란스러워서 머릿속으로만 외칠 뿐,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유리가 일방적으로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게 그렇게 신경 쓸 이유가 없어. 그래서 고민 했어…. 그리고 알아낸 거야.”

“뭐, 뭘 말이야?”

이제야 나도 겨우 입이 트여 당연한 물음을 내뱉자, 유리가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서로 끌리는 이 느낌은… 능력자간의 공명(共鳴)이란 걸.”

“잠깐만, 스톱. 진정해 서유리.”

“아, 나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방금 말로 알았겠지만… 나도 초능력자니까.”

아… 내 마음 속에 무언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조용하고 쿨했던 서유리. 언제나 손에 책을 달고 다니는 그녀는 약간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서유리는 문학소녀가 아니라, ‘망상소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망상을 풀어냈다.

“아카식 레코드에서 그노시스를 획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엄청난 믿음과 깨달음이 필요하거든. 그러나 그런 특수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걸 거야. 상반되긴 하지만, 사시스 계통일 경우도 아마 마찬가지일 테고…. 혹은….”

“대체 뭐라는 거야? 갑자기 어처구니없는 소리 하지 마!”

나는 온 힘을 다해 유리의 말을 막았다. 이 이상 아스트랄 계에 접속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말을 따라오지 못하는 듯했다.

“내게 초능력 따윈 없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숟가락을 구부리는 Y갤러 씨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나는 최대한 알아듣기 쉽게 설명했다.

초능력이라니 내게 그런 특이한 힘이 있을 리가 없다. 유리는 내 말을 듣고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

“그렇구나…. 넌 아직 각성하지 못한 거구나. 이런 경우에는 그노시스 특성에 따라 훈련을….”

아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 애에게는 내가 초능력자가 아니라는 전제는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유리가 무어라 무어라 설명을 하고 있지만, 내 귀에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그래서 내 뇌는 또 비상회의에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유리의 말을 멈추게 하고, 진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일격필살의 말을 찾았다.

그리고 내 머릿속의 제독은 하나의 대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나는 미처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생각한대로 말을 내뱉었다.

“야, 서유리. 너는 너랑 내가 초능력자랬지?!”

내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했다.

“나는 미각성이라고 치고, 그러는 네 능력은 대체 뭔데?”

이 병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걸 알면 대화는 더욱 혼돈으로 빠지고 만다고!

“……!!”

그러나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게 유리는 가볍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외로 동요한다?! 잘했어 나. 난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이대로 결정타를 날리자.

“어차피 네가 말하는 초능력이래봤자, 염동력이나 독심술, 텔레파시 같은 거겠지?! 그런 진부한 능력 따윈 믿을 수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짜 그런 능력이 있다면 엄청 대단한 거지만, 실제로 있을 리 없으니까 괜찮다. 그리고 그런 능력으로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어필하면 어떤 대답이 나와도 나는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자, 말해봐. 어떤 설정을 풀 건데!

설령 레일건이든 이매진 브레이커든 나는 놀라지 않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언변으로 확실하게 널 눌러주겠어.

나는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유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 지 유리는 두 손을 자신의 가슴에 모으고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이런 경우에는 내 쪽이 먼저 진실을 밝혀야 하는 거였어. 동류를 만난 건 처음이라… 조금 당황했어.”

말하는 거냐? 무슨 능력인데?

어쩐지 조금 기대가 되기도 하지만, 초능력의 설정이야 뻔하다.

“H.D.소로가 말하길, ‘진실을 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을 다하여 말하는 것이다.’ ”

유리는 표정과 자세를 바꾸고 어쩐지 경건한 느낌이 드는 잔잔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망상소녀가 말한 자신의 능력. 그것은….

“나는… 이 지구를 자전(自轉)시키고 있어.”

그 아득한 스케일에 나는 그만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 * *

“빌어먹을! 그 뒤로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어!”

나는 주먹으로 벽을 쾅쾅, 치면서 소리쳤다.

유리가 말하길 자신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고 한다. 너무나도 허황되기에 오히려 믿을 뻔했다. 나를 속이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좀 더 그럴싸한 능력을 댔을 테니까. 혹시 다단계 같은 모두가 행복해지는 이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지구를 자전 시키고 있댄다!”

나는 그 뒤로 혼란스러워서 유리의 말에 ‘응’, ‘그렇구나.’, ‘그거 대단하네.’ 같은 앵무새 대답을 반복한 뒤에 헤어졌다. 솔직히 어떤 대화(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가 오고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정규 수업이 끝나고 석식을 앞두고 있는 시간. 나는 기웅의 앞에서 아까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진정해 시영아. 그녀의 말에서 문제점을 찾았어.”

“당연하지! 여기에 무슨 근거가 있다는 거야?!”

“아니, 좀 더 진지한 얘기다.”

기웅은 짐짓 냉정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진정시켰다. 왜 이 상황에도 안경을 고쳐 쓰는데 가운데 손가락만 써서 내게 욕하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뭔데…?”

나는 상대적으로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기웅을 보고,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만약 그녀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면, 지구 나이에 일단 큰 모순이 생기게 돼. 지구의 나이는 흔히 50억년 이라고 하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말도 안 된다는 거야. 나도 그 자리에서 침착하게 방금 이론으로 반박했으면 좋았을 것을… 역시 지금 상황에서는 기웅의 판단력이 나보다는….

“하지만, 혈족계승이나 일자전승의 개념이 도입된다면 얘기가 달라져.”

“여기에다가 또 머리 아픈 설정 넣지 마! 그런 망상에 호응해주지 말라고!”

이 녀석은 이미 틀렸다. 정말로 인연을 끊을 때가 온 것이다. 미안하지만 정신병원 의사에게도 너무 벅찬 문제다.

“무례한 말이군. 유리 님 덕분에 우리가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기웅의 마음속에선 이미 유리가 신으로 승격했다.

힘들다. 너무나도 힘들다. 유리의 존재만으로 내 유연한 정신 방어력의 한계가 가볍게 무너지는 느낌이다. 초사이어인과 대적하는 야무차의 기분이 이랬을까?

“시영. 물어볼게 있다.”

“또 무슨 소릴 하려고 하는 거냐… 나는 지금 K.O되기 직전이라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너 초능력자가 아닌 건 확실하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런 특이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잖아. 난 죽어도 초능력자는 될 수 없어.”

“그래. 근데 유리 님은 너를 동류로 착각하고 있잖아?”

“그래서?”

기웅은 웬일로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너, 일단은 미각성인 초능력자인척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뭔 개소리야?!”

“아니, 진정하고 들어봐. 유리 님은 네가 초능력자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잖아? 그래서 자신의 비밀도 털어 놓았고.”

모두 유리의 착각이지만, 진짜건 아니건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게 한 것은 내가 맞다.

“그런데 네가 초능력자가 아닌게 밝혀지면,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잖아. 행여나 화라도 나서 지구의 자전을 멈추면… 인류는 멸망하는 거잖아?”

순간, 바보 같은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아주 조금 등골이 서늘해지긴 했다.

“바보 같은 소릴.”

나는 혀를 찼다. 정말 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

“그런 고로, 나는 너를 응원하겠어!”

“뭐?! 갑자기 왜 그렇게 되는 건데?! 넌 죽어도 유리와 내가 가까워지는 걸 반대하는 거 아니었냐?”

“하지만 이미 늦었으니까. 지구를 위해서는 네가 유리 님의 심복으로 있게 하는 게 좋겠지.”

기웅은 자신의 기준에서 그런 답을 내 놓았지만, 나로서는 반대다.

“난 그런 거 믿지 않으니까! 난 그런 괴상한 일에 휘말릴 생각 없어!”

나는 그러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슬슬 야자 시작 종이 치기 시작하겠지만, 오늘은 땡땡이치기로 결심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리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힘들다.

“난 땡땡이다. 유리 님을 모시든 말든 네 알아서 해.”

“야, 한시영! 기다려!”

난 녀석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부터는 유리를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까? 생각해보니 오늘 유리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유리는 내게 계속 접촉해올 모양인데, 얼굴이 예쁘다곤 하나 현실에서 그런 망상을 늘어놓는 아이는 아웃 오브 안중이다.

나는 하루히 파가 아니라 츠루야 씨 파니까.

꿀꿀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향하고 있자니, 교문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윤세린?”

“응? 시영이야?”

국가적 차원의 인재인 세린이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야자 시간인데 그녀도 여기 나와 있다는 건….

“뭐야. 반장 님도 땡땡이야?”

“무슨 섭섭한 말씀을. 나는 엄연히 허락받고 하교하는 거야. 야자는 안 하기로 되어 있거든.”

그러고 보니 세린이가 야자하는 모습은 못 봤던 것 같다. 학원을 다닌다거나 볼일이 있는 거겠지. 원래 성실한 아이니까 담임선생님도 흔쾌히 허락해주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유리도 야자는 안하는 것 같네.’

그럼 굳이 야자를 땡땡이 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으려나? 그냥 핑계 삼아 빠지는 거니까.

나와 세린은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잡담을 나누었다.

“그보다 너, 굉장히 지쳐 보이네. 어디 몸이라도 안 좋아?”

“뭐, 이래저래.”

“이래 저래 라니. 대충인 대답이네. 이 반장님에게 고민을 털어놓아보련?”

유리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고 커밍아웃한 것을 말하면 나도 세트로 비웃음을 당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로 세린에게 짐을 지게 할 순 없다.

그러다가 문득, 유리가 세린의 책을 창밖에 버린 사실이 떠올랐다. 유리는 분명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그렇다고 악의를 내 비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세린에게만 그렇게 대하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흐음….”

“우왓, 너, 너무 가깝잖아.”

정신을 차리니 세린이 내 얼굴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슬아슬 코가 닿을 정도로….

묘하게 좋은 향기가 난다. 역시 여자들은 다 이런 건가…?

세린은 갑자기 미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말하길.

“유리 때문에 고민하고 있지?”

“어떻게?!”

나는 깜짝 놀라 그만 실토하고 말았다. 제일 한국 교포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고등학생 명탐정이나 몸은 초등학생이지만 머리는 고등학생인 애늙은이 소년 탐정에게 트릭을 들킨 범인의 심정이었다.

세린, 무서운 아이.

“후훗. 너 정말 모르는 거야? 요새 네가 힐끔힐끔 유리를 보고 있다는 거… 여자 애들 사이에서는 유명해.”

“정말?!”

뭐 그런 오해가. 여자들은 그런 쪽으로 민감하니까 소문이 퍼진 걸까? 하지만 먼저 나를 보고 있던 건 분명 유리쪽이었을 터.

“유리한테 봄날이 오나… 하고 다들 기대하고 있어서 잠자코 있던 거야. 그런 타입을 공략할 때는 오히려 멍석을 깔아주는 게 역효과니까.”

“아니, 그런 의미로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닌데….”

“괜찮아. 괜찮아. 유리는 알고 보면 되게 착한 애니까.”

…세린은 분명, 유리가 자신의 책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대로 교과서를 그냥 준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고, 나중에 되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은 이미 창밖으로 버려진 상태다. 당연히 없다.

그런 관계를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하고… 친해?”

조금 우스운 질문이지만, 나로서는 최대한 돌려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세린은 손가락으로 턱을 괴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대답했다.

“어렸을 때는 친구였었어.”

과거형이다.

“지금은?”

“글쎄 어떨까… 유리는 날 싫어하지 않을까?”

역시나 그런 건가. 그리고 세린도 잘 알고 있고.

“교과서… 유리가 버린 거 알고 있어?”

“아, 그것도 봤어? 정말 하루 종일 유리만 쳐다보고 있구나? 사랑입니까? 청춘입니까?”

“그런 게 아니라니까.”

“책은 무사히 회수했어. 걱정 마.”

세린은 가방을 툭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찾아줬어도 좋았을 텐데… 가능하면 개입하고 싶지 않다는 귀차니즘 때문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보다 어렸을 때 친구… 인데 지금은 왜 그래? 싸운 거야? 유리 성격은 그때도 그랬어?”

“와, 정보 수집이야? 제법인데? 그 정도로 관심이 있다니, 우리 여자 진영은 조금 안심했어요.”

다른 의미의 관심이긴 하지만… 괜히 답답하니까 이것저것 묻게 된다. 아니면 세린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에 휩쓸린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듣는 건 반칙이야. 중요한 건 당사자에게 묻도록 하세요.”

세린은 내 머리를 톡톡 도닥이면서 선생님이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동급생 여자애한테 어린애 취급을 받으니 기분이 좀 그렇다. 그래서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니, 어느새 갈림길이 나왔다.

“나는 이쪽이야. 그럼 내일 보자!”

“으, 응.”

세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역시 좋은 녀석이네. 굳이 선택한다면… 유리쪽보다 세린 쪽이….’

아니, 나는 무슨 쓸 데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러니까 기웅이 녀석한테 만날 바보 취급당하는 거라고. 정신 차려, 한시영.

나는 고개를 좌우로 붕붕 젓고는 집으로 가고자 몸을 돌렸다. 그때. 또 눈앞에 보이는 소녀의 모습.

“우왓?! 서, 서, 서유리!”

“…….”

유리가 무표정이지만 무언가 불만이 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며 바로 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에 초능력에 대해 떠들 때와는 확연히 다른… ‘평소의 모습’이었다.

서유리를 피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만난 건, 내게 기습공격이나 마찬가지여서 당혹스러웠다.

“…세린이랑 뭐했어?”

“뭐하다니… 그냥 가는 길이 같아서….”

유리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이 말했다.

“그 애를 믿지 마.”

아주 조금이지만 발끈하는 심정이 들었다. 그 애는 세린을 말하는 건데… 미안하지만 ‘내 마음속의 그녀 랭킹’에서 그녀보다 위인 사람은 없다. 물론 가장 아래는 유리다.

“…무슨 의미야?”

나는 침착함을 유지하며 물었고,

“말 그대로의 의미.”

유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대답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다. 세린 같이 좋은 애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서유리. 넌 대체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뭘 하든 내 마음이잖아?”

“…말 안 들으면….”

조금이지만 유리의 표정에서 ‘분노’가 드러났다. 조금 무서워졌다. 안 그래도 불안정한 망상소녀가 무슨 짓을….

“지, 지구의 자전… 멈춰버릴 거야.”

“그렇게 나왔냐!”

협박의 스케일이 너무 커서 쉽게 와 닿지 않는다. 실제로 하면 대단한 것이긴 한데, 이런 일로 인류를 멸망시킨다는 발상이 유치하다.

결론적으로는 미묘한 협박. 기웅이라면 통했을 지도 모르지만 난 아니다.

“지, 진짜로 멈출 거야!”

거봐, 말하는 자기도 부끄러워서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이건 이거대로 귀엽… 이 아니라. 어쨌건 바보 같다. 하지만 본인은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건지 눈물까지 글썽였다.

뭐랄까… 유치원생이 떼쓰는 걸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납득이 가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모른다고. 너, 아까 수업시간에 세린이가 책까지 건네줬는데 버렸지? 왜 그랬어? 세린이는 나름대로 신경써준 건데 그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아, 아니야. 세린이는… 그렇게 착한 아이가 아니야.”

이거 그거구나. A는 B가 없는 곳에서 B를 칭찬하는데, B는 A가 없는 곳에서 A를 욕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는 미안하지만 A쪽의 호감도가 배로 증폭한다. B는 역으로 마이너스로 깎이고.

“야, 좀 실망했어, 서유리. 세린이는….”

“세린은!”

내가 무어라 말을 마치기 전에, 유리가 작은 두 주먹을 굳게 쥐고 내 말허리를 잘랐다. 그리고 몸을 작게 떨면서 외쳤다.

“세린은…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어…!”

이제 제발 그만 해.

나는 한심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어떤 망상이 나올지 대충 보였기 때문이다.

“세, 세린은…. 내 능력을 이용해서 세계정복을 하려고 하고 있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착하게 있지만, 매일 나를 습격해서…!”

“자, 이제 그만. 더 말하지 않아도 돼.”

세린 같은 애가 세계정복을 해준다면 환영이다. 분명 세계는 사랑과 희망이 넘치는 이상향으로 변하겠지.

“진짜야. 진짜로…!”

“아, 학원 갈 시간이다. 그럼 내일 보자 서유리.”

나는 국어책을 읽는 듯한 어투로 인사를 하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뒤에서 유리가 무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바이 바이 서유리. 이걸로 확실히 알았다.

나는 너와 관여되기 싫어. 이제 시선이고 뭐고 됐어.

* * *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핸드폰의 알람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느릿느릿 상체를 일으켰다.

“우함….”

늘어지게 하품 & 기지개. 진부할 정도로 평화로운 아침이란 이런 것이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 조금 찡그렸다.

아침 해가 떴다. 즉, 지구는 돈다.

뭐, 나는 갈릴레이정도의 선구자는 아니지만 지구가 돈다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없다. 예전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돈다고 생각해 갈릴레이를 매도했지만, 결국에는 그의 말이 맞았다.

모두가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만이 보았던 진리.

한 사람만이… 믿는 것?

…모르겠다. 난 갑자기 무슨 사색을 하고 있는 걸까? 어제 유리 때문에 겪었던 혼란 때문에 태양을 보면서 쓸 데 없이 감성적이 되었나 보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인적이 적은 등교 길.

또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느릿느릿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리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손에는 조금 커다란 책. 나를 직접 바라보고 있지 않는 것도 평소와 다름없다. 어제처럼 가까이 다가와서 망상을 늘어놓지는 않는다.

좋아. 이 정도는 익숙해졌다. 아무래도 유리는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만 망상소녀가 되는 모양이다.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목소리.

“헤이. 거기 시영 군. 좋은 아침.”

“아, 세린아.”

우리 반 반장 세린이 인사를 해왔다. 등교 길에서 만난 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성격이 밝은 아이다 보니 이쪽도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오늘은 표정이 제법 괜찮네?”

“아, 인간을 그만두었거든. 인간을 초월했지. 달관의 경지에 들어선 거야.”

“큿큿, 그게 뭐야 애늙은이처럼.”

세린은 귀엽게 웃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게 되었다. 세린은 뒤에 유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뭇 남학생들이 부러워할만한 상황이니까 조금 즐겨볼까.

…라고 생각한 순간 등을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것은 유리 것이었다. 힐끔 돌아보니 웬일로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노려보았다.

유리 녀석, 제법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군.

현실에 피드백을 한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나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그렇겠지?

결국, 수업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유리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결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기웅은 힐끔 힐끔 유리를 신경 쓰면서 상태를 살폈지만, 이 녀석은 유리의 망상모드를 본 적이 없다. 그저 평소와 다름 없이 보이겠지.

그렇게 평화롭게 시간이 지나갔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뭐지?’

문득, 책상 서랍에 편지가 들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헉?! 이것은?!’

분홍색 편지 봉투에 가운데는 하트 스티커가 부착된 물건. 지금은 환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물건은 많은 남자들이 찾고 있으나 결코 현실에서는 구할 수 없는 레어 아이템.

‘서, 설마 러브레터?!’

아니, 아니, 아니. 그럴 리가.

내게 이런 특이한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러, 러브레터라니 이런 건 10대 남자 청소년을 대상으로한 엔터테이먼트 소설에서나 나오는 환상이라고!

그러나 이런 게 들어있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주변(특히 김기웅)에 들키지 않게 슬쩍, 봉투를 개봉했다.

그곳에 들어 있었던 건….

점심시간에 과학실에서 기다릴 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윤세린

윤세린?!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세린이가 없다. 점심시간 끝나기 직전인데… 설마 기다리고 있는 건가? 나는 또 다시 혼란의 컨퓨젼에 빠졌다.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잖아? 기다리고 있겠다는데 가지 않으면 실례니까.

어째서 과학실인가 하면, 분명 열쇠 담당이 세린이였고, 아마도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육상부 부장이 날 불러 세워 스카웃 제의를 할 정도로 달리고 달려 과학실 앞에 도착했다.

‘흐읍.’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셔 호흡을 가다듬고 과학실 문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들어와.”

세린의 목소리였다. 나는 낚시 같은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을 열었다.

알싸하게 코를 자극하는 과학실 특유의 냄새. 불은 꺼져있었으나 커튼이 걷혀있어 시야에는 문제없었다. 그 창문을 등지고,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소녀가 하나.

당연히 윤세린이었다.

“늦었잖아. 안 오는 줄 알았어. 역시 편지로 전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나?”

“아, 미안… 지금 막 확인했어.”

“괜찮아. 어차피 과학실 청소 담당이었으니까.”

세린은 밝게 웃었다.

…이런 걸 후광효과라고 하나, 등 뒤에서 빛을 받으며 웃는 세린의 미소는 숨 막히게 예뻤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나는 멋쩍어서 시선을 피하고 과학실 문을 닫았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세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야, 그 표정? 설마 내가 고백이라도 하려고 불러낸 줄 알았어?”

“……!!”

…솔직히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그런가요?

역시나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지.

“미안, 미안. 오해하게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 오늘 핸드폰을 안 가져 온데다 편지지가 그것밖에 없었거든.”

“아, 그래…. 그래서 용건은 뭐야?”

오히려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나는 언제나 현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넘어가는 인간이니까. 아침에는 인간을 초월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세린은 엿차, 하는 소리와 함께 과학실 창가에 걸터앉았다. 자칫하면 치마 안의 그것이… 이 이상 말하는 것은 무사의 도리에 어긋나니까 생략.

“다름 아니라 유리 때문인데.”

“…응?”

새삼스레 유리에 대해 나랑 할 얘기가 있나?

내가 고개를 갸우뚱 하자 세린이 수줍게 웃었다.

“아니, 어제 좀 재미있는 장면을 봐서. 나, 학교에 놓고 온 게 있어서 다시 돌아가다가 시영이 너랑 유리가 얘기하는 걸 봤거든.”

그건 안 좋다. 자전을 멈춘다든가 어쩐다든가 하는 얘기를 했었지. 아, 그것보다는 세린이 세계정복을 하려 한다는 얘기도 있었구나.

“조금 놀랐어. 유리가 다른 사람하고 그렇게 많이 얘기하는 건 처음 봤거든. 마치 예전의 유리 같았어.”

세린은 예전에 유리의 친구였… 었다. 그때 유리는 지금 같지 않았구나. 그래서 친구로서 흥미가 생긴 거겠지.

“나는 처음 보는 모습이어서 놀랐지만, 뭐 얘기는 거의 다 들었지? 망상을 좋아하더라.”

“망상? 아아… 그 얘기 말이지.”

역시 세린도 들은 모양이다. 모두 바보 같은 얘기지만.

“응, 유리는 자기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고 생각해. 게다가 너는 세계정복을 하려 한다나?”

“하하. 그 애다워. 책을 워낙 좋아했으니까. 어쨌거나… 네가 유리랑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어서 놀랐어….”

“하하하. 나는 어처구니없었지만.”

“…정말 놀랐지 뭐야.”

나와 세린은 유리의 새로운 모습을 떠올리면서 웃었다. 그렇게 웃다가… 갑자기 세린의 목소리를 바꾸면서 뜻밖의 말을 내뱉었다.

“너에게 비밀을 얘기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응?”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찰나, 바로 눈앞에서 세린이 사라지는가 했더니… 느닷없이 코앞에 나타났다.

곧이어 내 시야가 빙글하고 돌았다.

“어…?!”

쿵쾅. 소리가 들리면서 갑자기 등이 아파왔다. 나는 어둑어둑한 천장을 보고서야 내가 바닥에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크엇?!”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등이 엄청 아프다. 이어서 세린이 한쪽 발로 내 가슴을 밟았다.

“쿨럭. 세, 세린아?”

무슨 기술이라도 쓴 것인지, 세린의 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게다가 이 각도… 나는 누워있고 그녀가 한 발로 날 밟고 있다는 것은 치마 속의 그것이… 이 이상은 무사의 도리로… 쿨럭!

“어디까지 들었는지 말해 주겠어?”

“크흑!”

갑자기 발에 힘이 들어왔다. 명치를 눌리고 있는 탓인지 팔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였다가는 어떤 공격이 올지 알 수 없어 무섭기에 그만 두었다.

나 소년소설 주인공으로는 부적격인 듯하다.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 귀를 못 알아듣는 남자는 싫어해.”

세린은 싱그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날 질책했다. 그 모습은… 몹시 이질적이어서, 유리의 망상모드를 봤을 때와 같은 충격이 있었다.

그보다 이 전개는 대체 뭘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나는 멍청한 주인공이 아니라 스마트한 주인공이니까 상황을 정리해서 요약해보자.

사실 할 것 도 없잖아.

믿기는 힘든 일이지만….

“설마… 사실이야?”

“그걸 굳이 입으로 확인해야 하는 거야?”

사실이라고? 세계정복이야기가? 아니 그렇다면 그 전제인 ‘유리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라는 것도 사실이 된다. 설마 이런 어이없는 이야기가 진짜라는 건가?

유리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는 얘기를 믿으라고?

“그래? 별로 많은 얘기는 못들은 모양이네?”

“아, 아까 그게 다….”

세린은 날 심사라도 하듯이 쭉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빙긋 웃었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 정도라도 말했다는 사실이 중요해. 그 애는 평생 자신의 능력을 얘기하지 않을 생각이었을 텐데. 어떻게 한 거야?”

어쩌고 자시고도 없다. 내가 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어제 유리가 갑자기 다가와서는 혼자 망상(아직까지도 인정 못하는 나)을 얘기한 것뿐이니까.

나는 힘겹게 어제 있던 일을 얘기했다.

“과연…. 그래서? 솔직히 말해볼래? 한시영, 너는 초능력자야?”

이 질문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지긋지긋하다. 결국, 나는 당연한 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글쎄… 아니라니까. 절대 그렇지 않아.”

“그래, 유리가 착각한 걸 수도 있지.”

세린은 납득한 듯했다. 무엇보다 내가 초능력이 있다면 지금 동급생 여자애에게 밟혀서 벌벌 기는 이런 상황이 생겼을 리가 없지.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이런 식으로 아무 상관도 없는 반 친구가 비밀을 알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

아직까지도 나는 세린의 말을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지구를 자전시키는 능력도 그렇고, 한국의 평범한 여고생이 어떻게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일까?

무얼 먼저 물어야 할 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이럴 때, 세계 정복을 노리는 보스다운 결정은 역시….”

세린의 목소리가 어둡다. 그리고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처리하는 거겠지?”

“……!!”

바로 그때였다.

쿠당당탕탕. 과학실 문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먼지와 시원한 바람이 느껴졌다. 그리고 인기척도.

“……?”

내 쪽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알 수 없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를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지는 대충 알 수 있었다.

“시영이를 놔줘.”

서유리가 온 것이다!

“어라, 유리쪽에서 내게 다가온 건 처음이 아닌가? 늘 도망치기 바빴을 텐데?”

“…처음으로 만난 동류야. 그냥 둘 순 없어.”

이게 무슨 꼴이지? 남자인 주제에 두 여고생 사이에서 무기력하게 뻗어있는 모습이라니! 아무리 나라도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이얍!”

“뭐, 뭐! 꺄앗!”

세린의 주의가 유리에게 쏠린 틈에 나는 양손으로 그녀의 발을 잡아 치우고 멀리 떨어졌다. 세린은 제법 귀여운 비명을 지르면서 역시 거리를 벌렸다.

나는 자연스럽게 유리의 조금 앞에 서서 거친 숨을 가다듬고 자세를 잡았다.

이걸로 2:1이다. 뭐가 어쨌든, 나는 남자고 유리는 핵폭탄급의 전략무기(지구자전)가 있다고 하니까 어떻게든….

“시영아. 도망치자!”

“으, 응?”

모처럼 남자로서 전투의욕을 불태우려고 했으나, 유리가 내 손을 잡아끄는 바람에 나는 엉겁결에 함께 달리게 되었다.

“정면으로 싸워서는 못 이겨.”

그런가, 이 녀석은 세린과 많이 부딪쳐봤겠지. 그럼 여기서는 잠자코 전문가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군.

학교 수업종이 울린다.

함께 도망친 우린 어떻게 되었냐고 한다면… 평범하게 교실에 돌아와 있었다!

이 무슨 무서운 일이란 말인가? 학생은 어떻게 해도 학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방금까지 세린에게 처리당할 뻔한 상황이었는데 어째서 교실에 있단 말인가!

이유인 즉, 유리가 날 이끌고 왔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더 어이없는 건 세린조차 수업시간에 들어왔단 것이다.

내 앞쪽에서는 세린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반을 통제하고 있었고, 대각선 뒤쪽에는 유리도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다.

어째서 태연히 있을 수 있는 걸까?

수업시간 내내 나는 복잡한 생각에 빠져 고뇌하고 있었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된 것도 모르고 생각에 빠져있던 내 옆에 한 소녀가 다가왔다.

“시영아.”

“흐어어어어어어어억!”

내 옆에 다가온 소녀-세린의 목소리에 나는 기겁해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순간 반 친구들의 시선이 내게 꽂힌다.

당연하다는 듯이, 모두 의아한 눈이다.

“…저기 시영아 괜찮아?”

세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과 목소리는 분명 내가 평소에 봐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분명 조금 아까까지는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다, 어쩐다 했는데?

“여기… 프린트. 몸 안 좋으면 선생님한테 말씀드릴까?”

“아, 아, 아니야…. 아무 것도.”

미묘한 분위기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조차 유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혹시… 지금까지의 일은 꿈이었나?

그래, 그럴 거다. 바보 같은 설정도 정도가 있지.

정신 차려 한시영. 밥 먹고 잠깐 졸았던 걸 거야.

나는 자신을 진정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숨을 고르다가 문득, 손에 잡힌 프린트를 보았다.

이건 국어 프린트. 다음 시간에 필요한 거긴 한데… 가운데 작지만 확실한 글씨로 이렇게 써 있었다.

-말하면 죽어.

“……!!”

세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서는 싸늘한 미소를 보냈다.

진짜다.

뭐가 어쨌든 아까 있던 일은 진짜라고!

* * *

얘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부족한 몸이지만, 일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는 유리라고 하는 문학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실제로는 망상소녀와 만났습니다. 그녀가 말하길 저는 초능력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마찬가지며, 그 능력은 무려 ‘지구를 자전 시키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덧붙여 동급생의 멋진 반장 소녀는 유리의 힘을 이용해 세계정복을 하려한다고 합니다.

지금부터 초능력이 들어간, 러브 코미디로는 2%부족하고 배틀물로는 50%부족한 이야기가 전개될 것 같습니다.

…라니 장난하냐? 이런 얘기를 해봤자 다들 3류 소설이라고 분서할 상황이잖아.

하지만 내게는 틀림없이 일어난 현실이었다. 아직까지 100%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주변에 무언가 특이한 일이 일어난 것은 맞다.

그런 것을 바라진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석식이 시작하기 전에 유리를 불러내서 소각장 옆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갔다. 무언가 야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서유리. 솔직하게 얘기해 줘!”

내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근본적인 질문을 했다.

“너… 정말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어?”

새삼 다시 확인하는 내 자신이 한심하긴 하지만, 인간은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는 법이다.

유리는 스윽,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칼릴 지브란이 말하길, ‘경험보다는 믿음이 진리를 더 빨리 파악한다.’ ”

그리고 이어서

“…맞아.”

…라고 말했다. 잘 모르겠지만, 믿으란 얘기인 것 같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래도 유리와 세린의 관계는 학교 시간 이외에 진행되는 것 같다. 수업시간에 세린은 반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좋은 학생(물론 속은 시꺼멓지만), 유리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침묵의 문학소녀.

그렇다면 나는 뭐지?

유리에게 초능력이 있다고 착각당한 고등학생이며, 세린에게 있어서는 비밀을 알았기에 처리해야하는 대상.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는 역시 이 일에 상관없는 사람이 아닐까? 여기서는 유리를 도와줘야지!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박해주겠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스케일의 소녀와 지구를 집어 삼키려는 스케일의 소녀 사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아니면 무엇을 해야 하는데?

내겐 그 답이 없다. 애초에 이런 특이한 일은 내가 바라는 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인적 없는 곳으로 오다니, 생각보다도 어리석네.”

“…윤세린?”

유일한 탈출로에서 세린이 다가왔다. 나와 유리는 긴장한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시영이 너는 완전히 유리 편에 선 모양이네?”

“…아니, 딱히… 그런 건.”

뒤에서 유리가 어쩐지 기대하는 표정으로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아. 유리야. 오늘에야 말로 우리 악의 조직 ‘핑크팬텀’에 힘이 되어주어야겠어.”

우와, 이름 엄청 유치하다. 어쩐지 귀여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어.

세린은 당당하게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주변에 검은 타이즈를 뒤집어 쓴 다섯 명의 괴인이 나타났다. 역시 내가 보기엔 쪽팔리다 못해 자살할 것 같은 패션이다.

“끼이이이잇!”

“끼이잇.”

저마다 괴상한 퍼포먼스를 취하며 세린을 중심으로 출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동료가 있었던 건가…?”

“나… 나도 처음 봐.”

옆에서 유리가 내 팔뚝을 잡고 뒤쪽으로 숨었다. 저런 녀석은 처음 본다니?

“유리에게 동료가 생겼으니 나 역시 카드를 숨길 필요는 없으니까.”

괴인들 사이에 있는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악의 조직 보스였다. TV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세린이가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여고생이고 예뻤다는 점만 빼면.

“본격적인데… 대체 어떻게 세계정복을 하겠다는 거야?”

“그런 건 유리를 얻고 나서 생각해도 돼. 그 애의 능력은 정말이지 특별한 거니까.”

세린은 우아하게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기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엉성한 계획인데? 실제로는… 아무 생각도 없는 거 아니야?”

“……!”

그냥 기세에 지기 싫어 한 말인데, 뜻밖에 세린은 어깨를 들썩였다.

설마… 진짜로 아무 생각도 없는 건가?

그때, 뒤에 있던 괴인 1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멍청이! 세린 님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단 말이다. 아마도…. 너 따위에게 말해줄 것 같으냐!”

‘아마도.’가 붙은 시점에서 이미 진 것 같은데. 그보다.

“야, 그 목소리. 설마 태섭이냐?!”

내 물음에 방금 말한 괴인 1도 어깨를 들썩였고, 덩달아 다른 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바보 자식. 목소리는 내지 않기로 한 거였잖아?”

“야, 너도 말했어!”

“그러는 너도.”

“야, 모두 입 다물어.”

뭐지 이 바보들은? 그보다 지금 목소리들 하나 같이….

“야, 준환, 대희, 해준. 지현 너네 다 뭐하는 거야?”

전부 우리 반 애들이다.

“지금 이거 무슨 연극하는 거야?”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물론 지금까지 이야기에서 그렇게 진지해질 부분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시끄러워. 우린 어쨌건 평생 세린 님을 따르기로 했으니까 입닥쳐.”

처절한 인생이다. 그런 타이즈를 입으면서까지 수하로 남아 있고 싶다니…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것 같다.

분위기가 묘해지자, 세린이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 나섰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다니, 유치한 타이즈를 입고 있는 녀석들의 마음도 헤아려주라고.”

“본래 학생의 본분은 공부니까, 학교 안에서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조건이었지만….”

엄청 착한 악의조직이다. 그래서 지금의 암묵적인 룰이 형성된 거구나.

“동료도 생긴 모양이고, 여기에는 보는 사람들도 없으니까 괜찮겠지.”

동료라는 건 아마도 내 얘기겠지. 얼떨결에 유리와 한 세트로 묶여 버렸다. 결국 이렇게 휘말려 가는 걸까? 아니 그보다 이 긴장감 없는 개그 상황에서 나는 굳이 진지해질 필요가 있는 걸까?

이건 현실일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시영아… 조심해.”

뒤에서 유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이해가 안 가… 이거 아무리 봐도 애들 놀이잖아?”

사실 딱 보기에도 그렇다. 유리의 자전능력을 차치하고서라고, 동급생 반장이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고, 같은 반 친구들이 검은 타이즈를 입고 특촬물을 찍고 있는데, 어느 부분에서 위기를 느껴야 하는 거야?

“놀이…?”

그러나 내 말에 유리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자… 유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놀이… 가 아니야….”

하지만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놀이가 아니야. 왜냐하면….”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약간 눈물이 글썽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내 심장이 덜컹 떨어지는 줄 알았다.

“우리 부모님은 세린에게 당해 돌아가셨는걸.”

“……!!”

내가 놀라는 것과 반대로 세린은 빙긋,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마치 자신의 예술작품에 만족해하는 예술가처럼.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유리의 표정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슬퍼보였다. 한 손에 든 책을 품에 안고, 다른 한 팔로는 내 팔을 부여잡고 살짝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거짓말이나 망상과는 확연히 다른… 정말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에 젖어 우는 소녀의 그것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큰 이변이다.

아주 큰 이변이다.

유치원 학예회 같은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슬퍼하며 울고 있는 한 소녀를…

…내가 끌어안았다는 사실이.

왜 그랬지… 라고 묻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미소녀의 눈물은 어떤 남자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기라고 하니까.

나는 온 힘을 다해 유리를 껴안았다. 나로 위안이 될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부디 그러길 바라며, 눈물을 그치기를 바라며 아무 말 없이 끌어안았다.

작다. 내 팔 안에 들어온 소녀는 너무나도 작아서…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렇게나 가녀린 소녀는 홀로 지구를 자전시키고, 핑크팬텀에 맞서 버텨온 거구나….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기분이었다. 나 참, 이래서 여자의 눈물은 무섭다고 하는 거다.

이런 특이한 일을 겪는 걸 가장 싫어하는 내게 이런 마음을 갖게 하다니 말이다. 아니, 학교에서 동급생 여자애를 끌어안고 있다는 게 이미 특이하고도 남을 일인가?

어쨌거나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울어….”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유리의 흐느끼는 소리. 이런 말로는 눈물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스읍,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확인한 뒤, 각오를 다지고 입을 열었다.

“나는 절대로 초능력자는 될 수 없어. 하지만… 그러니까 ‘동류’도 아니지. 네 말대로 언젠가 각성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 지금은 아니고.”

품 안에 느껴지는 체온. 부드러운 유리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초능력자가 아닌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나름 진심을 담아 전한다.

“동류대신 네 ‘친구’가 되어 줄게.”

“……!”

그리고 내 말에 유리가 어깨를 살짝 떨면서 반응했다.

그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비슷한 능력을 지닌 특이한 누군가가 아니라… 평범한 친구일 지도 모른다.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유리의 훌쩍이는 소리가 사라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저….”

그리고 너무나도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두근!

윽, 이거 위험하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동자가 작은 빛을 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기대와 희망, 혹은 기쁨일 것이다. 무표정인 듯이 보이지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봬도 대한민국의 건아.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한데다가 이런 분위기면 이제는 못 먹어도 Go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때, 완전히 잊고 있었던 세린이가 끼어들었다.

“자아, 보기 좋은 장면이긴 한데. 우릴 너무 잊으면 섭섭해.”

말 그대로다. 저쪽 숫자가 너무 많다. 설마 같은 반 친구에게 심한 짓이야 하겠냐마는… 유리의 부모님 얘기도 있으니까 마음 편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쩐다? 도망갈 길은 저기 하나뿐인데.’

“시영이 네가 유리에게 붙어서 다행이야. 너를 잡으면 인질로 쓸 수 있겠지?”

세린의 말에 호응하듯이 괴인(반 친구들)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릴 생포할 샘이다. 너네 나중에 두고 보자.

여기선 내가 멋지게 시간을 끌고, 돌파구를 만들어 유리를 도망치게 하는 게 최고긴 하지만, 세린의 말대로 내가 인질로 잡혀버리면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모두, 두 사람을 잡아와!”

“옛서~!”

결국 괴인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젠장, 답지 않게 폼 잡자마자 위기 상황인가?!

나는 식은땀을 흘렸고, 유리는 내 등에 착 달라붙은 채 떨었다.

바로 그때.

“모두 멈추시지?”

“…누구?”

이 목소리는….

“김기웅!”

나는 반갑게 내 악우의 이름을 불렀다. 세린의 뒤쪽에서 녀석은 안경을 고쳐 쓰며(역시 가운데 손가락만으로), 이쪽으로 당당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녀석이 이용하는 캔 커피도 들렸다. 여유롭군. 어쩐지 조금 멋지게 보인다.

“어머, 기웅이잖아? 여기엔 무슨 일이야?”

세린이 표정을 바꾸어, 평소처럼 상냥한 반장으로 돌변하여 물었다.

“방금 얘기는 대충 들었어. 유리 님이 위험하다는데 내가 가만있을 수 없지.”

내 뒤에 있는 유리는 ‘유리 님’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지금 그걸 설명하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래?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이대로 입 다물고 돌아가 줄래? …라는 건 역시 통하지 않겠지?”

기웅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할 수 없네. 갑자기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잖아? 괴인들아 기웅이부터 처리해.”

“예스 유어 마제스티!”

“옙!”

괴인들이 방향을 바꾸어 기웅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때 녀석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폭력으로 일을 해결하려 한다면, 나 역시 폭력을 쓰는 수밖에 없지.”

그 미묘한 박력에 나를 포함한 모두가 조금은 긴장했다.

저 녀석, 싸움을 할 줄 알든가? 분명 운동신경은 꽝이고, 애초에 근성이라는 단어도 없는 녀석인데?

기웅은 스읍, 숨을 들이마시더니,

“선생님! 선생님! 여기 이상한 사람들이 있어요!”

교권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변태가 있어요! 꺄아~ 제 옷을 벗기려고 해요.”

그렇구나 생각해보면 여긴 학교고 세린과 유리는 자신들에 대해 비밀로 하고 있으니까 사람들 눈에 띠어서 좋을 게 없지.

“우읏?! 치, 치사하게!”

세린이 혀를 찼다. 효과 발군이었다. 이어서 괴인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우왕좌왕했다.

당연하다, 학교에 저런 수상쩍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도 선생님에게 밝혀지면 앞으로 학교생활은 종쳐야 되니까.

“세린 님! 어떻게 하죠! 이러다가 선생님께 걸리면!”

“아, 안 돼. 우리 어머니는 내 성적표 때문에 요새 저기압이라고!”

그 동안에도 기웅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선생님들을 불러댔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괴인들을 훑어본 세린은 당연한 결단을 했다.

“하, 할 수 없지. 오늘은 이만 물러나 주겠어! 두고 봐!”

전형적인 3류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사라졌다.

세계정복을 하려는 마당에 선생님을 무서워하다니, 개그가 따로 없다. 도망치다 선생님의 눈에 띤 모양이지만, 괴인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수상한 건 괴인들뿐이니까.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이스 타이밍이었어.”

“훗, 별 거 아니다.”

기웅은 어째서인지 쿨하게 대답했다. 아마도 유리가 있어서겠지. 뒤에서는 유리가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밀을 기웅이도 들어버려서 일까?

그녀는 나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여전히 내 등에 몸을 반쯤 숨기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기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기웅이 피식 웃었다.

“역시 유리 님은 네게 맡겨야 겠군. 오늘 일은 아예 없었던 걸로 하고 비밀을 지키마.”

“뭐?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거야?”

“…유리 님이 저래서야, 오히려 옆에 있는 게 방해겠지. 하지만 도움이 필요할 땐 종종 내 이름을 불러다오. 내 이름은 시드 고등학교의 고독한 전사 김기웅!”

네 이름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 제발 그런 멋있지 않은 폼은 잡지 마.

“그럼! 앞으로도 유리 님을 잘 부탁한다!”

그러더니 기웅은 양 팔을 들고 남자다운 자세(?)로 인사를 하며 사라졌다.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대체 뭐야 저 녀석….”

내가 멍한 눈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문득 팔에 유리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직도 겁을 먹은 것인지, 아니면 혼란스러워하는 건지 내 팔에서 떨어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여전히 파괴력 있는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음. 이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겠지.

나는 유리의 머리에 탁,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 * *

그 뒤로 우리들의 일상은… 생각보다 별로 변하지 않았다. 뭐랄까… 어떤 의미로는 허무할 정도였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다.

“한시영.”

“웃, 윤세린! 또, 또 습격하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니고. 내일부터 시험이니까 당분간은 추격하지 못할 것 같아서 미리 말해두는 거야.”

“뭐…? 그렇게 말하고는 방심하게 해서 뭔가 하려는….”

“나는 반장이니까 성적을 유지해야 한다고! 악의 조직 보스랑 반장 일이랑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아, 미, 미안.”

묘한 이유로 설득당해 버렸다.

혹은 이렇기도 하다.

“야, 태섭, 준환, 해준, 대희, 지현. 너희 대체 무슨 생각이야? 뭘 꾸미는 거야?”

괴인 5인반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꾸미긴 뭘, 우린 세린님의 명령을 따를 뿐이야.”

“귀엽잖아!”

“섹시하기도 하지!”

“야, 그것보다. 야자 땡땡이 까고 PC방 안 갈래?”

“우린 다섯 명 이잖아. 세린 님이 갈리는 없고… 아, 시영이 너, 같이 갈래?”

괴인들에게 PC방에 같이 가자고 권유를 받기도 했다.

학교가 끝난 후에는 정말 습격을 해오긴 하지만, 지금까지 어찌어찌 도망칠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일체의 습격도 이루어 지지 않았으니, 실제로 쫓기는 시간은 하루 한두 시간 정도다.

피곤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적당한 운동이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게 미묘한 상황을 맞이한 지 약 한 달이 지났다.

“이 허무한 느낌은 대체 뭐지….”

나는 요새 상황 때문에 고민 아닌 고민에 빠졌다. 그런 일을 겪었으면서도 오히려 별 것 없어서 놀랍다고 해야 할까? 맥이 빠진다고 해야 할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일과를 늘 유리와 함께하고 있고, 주위에서는 사귀는 거라고 소문이 났으며, 가끔 저녁에는 세린이가 ‘다음엔 놓치지 않을 거야.’라고 문자를 보내고, 나는 ‘잡힐 것 같으냐?’라는 문자를 보내는 사이가 되었다는 것 정도.

지금도 점심시간이 되자 나와 유리는 함께 밥을 먹고 사방이 탁 트인 운동장 벤치에 앉아 남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지형이면 습격도 힘들 테니까 말이다.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고, 유리는 침묵한 채 책을 보고 있었다.

하도 무료해서 물었다.

“책 재미있어?”

“해럴드 블룸이 말하길, ‘제대로 된 독서는 고독이 줄 수 있는 훌륭한 기쁨 중 하나이다.’ ”

유리는 시선을 책에 고정한 채 그렇게 대답했다.

고독이 줄 수 있는 기쁨….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지금까지 유리의 상황과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지구를 자전 시키는 능력. 그런 게 정말 있고, 악의 조직에게 쫓기고 있다면, 주위 사람들과 관여하는 것만으로 폐를 끼치게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누가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가능하면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원래부터 독서를 좋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독서 외에 고독을 달랠 방법이 없었던 거겠지.

문득, 나로는 안 되나 하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해버렸다.

아무렴 어떨까…. 멍하고 있자니, 갑자기 유리의 시선이 느껴져 그쪽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리에게 신경 쓰기 시작한 건 이것 때문이었지, 요 한 달 간도 종종 시선이 느껴진다.

“저기, 유리야.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응?”

“혹시… 너 거의 두 달 전부터 날 보고 있지 않았어?”

내 말에 유리는 책에서 시선을 때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날 바라보았다.

“아닌 건가…? 아니면 됐어.”

애써 부정하려고 했지만,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군. 내가 느낀 시선은 아마도….

-띵동 땡동~ 띵동 땡동~

어느새 점심시간 끝을 알리는 예종이 쳤다. 슬슬 수업에 들어가야겠다.

자리에 앉자 앞에서 세린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고,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수업준비를 했다.

보아하니 하교 길에 또 습격해 올 셈이다. 이제는 잡히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순수하게 호기심이 들 정도로 익숙한 상황이었다.

결국 수업이 끝난 후, 하교 길에서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다만, 유리는 미리 안전한 곳에 숨어 있었기에 나만 쫓기게 되었다.

“한시영! 거기 서!”

“거기 서라! 이 자식 발은 빨라가지고!”

“야, 근데 우리 말 안하기로 한 설정은 이제 안 써도 되는 거야?”

“이제 와서 새삼 뭘!”

세린과 괴인들이 쫓아온다. 평소대로라면 이대로 도망치다가 결국 내일을 맞이하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내 앞에 막다른 골목이 나타난 것이다. 결국 나는 퇴로를 잃어버린 채. 세린과 괴인들에게 포위당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세린이 웃었다.

“후훗. 바보. 이 동네에 살면서 거기가 막다른 길이라는 걸 몰랐던 거야?”

나는 세린 일행을 마주보았다.

“그럴 리가 있나? 당연히 알고 있지. 여기라면… 유리가 숨어 있는 장소랑 꽤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미안하지만 오늘은 일부러 이곳에 온 거라고.

내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지 세린과 괴인들이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이제 그만 끝내려고.”

세린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녀는 잠깐 입을 다물더니, 잠시 후 물었다.

“어떻게? 뭘 끝낸다는 거야? 끝나는 건 너 같은데?”

“그러니까. 이런 장난질을 끝낸다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굳이 말할 것도 없지만 이 상황은 아주 이상하다. 애초에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느낄 수 없는 3류 연극 같았으니까.

“윤세린. 솔직히 말해. 지금 너랑 유리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를 골탕 먹이기라도 하려는 거야?”

“그건 이미 예전에 말한 것 같은데…? 나는 유리의 힘을 이용해 세계정복을….”

세린이 빤한 답을 하려했지만, 내가 막았다.

“거짓말 하지 마.”

“…….”

“세상에 어느 세계정복을 꿈꾸는 야심가가 학교생활에 방해 안 되게 타깃을 노린다는 거야?”

내 물음에 세린과 괴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 유리는 정말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어? 그리고… 정말 네가 유리의 부모님을 살해한 거야?”

유치한 연극에서 유일하게 심각한 부분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유리의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딱히 비밀이랄 것도 없이,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였으니까.

다만, 어떻게 죽었는가가 중요하다.

세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참을성 있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마도 유리의 부모님 일이 이 일에 핵심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른다.

세린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고, 그 사실만으로도 내 가정이 맞다는 것을 증명했다.

분명 무언가 있다.

“솔직히 말해 봐. 어디까지가 사실인 거야?”

내가 마지막으로 진지하게 묻자. 세린은 살짝 슬픈 눈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유리하고 나하고만… 이렇게 지냈으면 됐어.”

“지구를 자전시킨다는 설정이랑, 악의 조직 말이야? 왜 너희 둘의 장난에 나까지 말려든 거야?”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잘못생각하고 있어. 그동안 유리 옆에 있었으면서 모르겠어? 그 애는 진심으로… 자기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내가 자기 부모님을 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차피 오래 어울려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말할게. 단… 유리에게는 비밀로 해 줘.”

그리고… 세린은 숨겨진 얘기를 시작했다.

* * *

약 10년 전.

유리는 어려서 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무슨 책이든 가리지 않고 읽었고, 그것은 교수인 아버지, 어머니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때, 유리와 세린은 아주 친한 친구였다.

함께 책을 읽고, 만화를 보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

“키케로란 사람이 말했대. 우정은 풍요를 더 빛나게 하고, 풍요를 나누고 공유해 역경을 줄인다.”

“그래? 근데 무슨 말이야…? 어려워….”

“세린이랑 나는 친구라는 거야! 세린이가 힘들 때는 내가 도와줄게.”

“아, 그런 거야? 그럼 나도 그래야지.”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다.

유리의 생일날. 그녀는 곰 인형을 선물로 받았다. 너무 기뻐서 하루 종일 껴안고 다닐 정도로 그 인형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맙습니다~! 갖고 싶었던 인형이야!”

“좋아하니까 다행이네. 오늘 주인공은 유리니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보렴.”

“음~ 뭘 먹을까?”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유리의 아버지가 운전을 하고, 조수석에 그녀의 어머니가 타고, 그 어머니 무릎위에 인형을 안은 채 앉았다.

“엄마. 아빠. 인형 이름은 뭐로 지어줄까? 세린이한테도 보여줘야지.”

그리고 인형을 가지고 놀던 중에, 그것이 운전석 브레이크 아래쪽으로 떨어졌고, 사소한 실수가 운전을 방해하게 되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콰아아앙!

그 결과. 안타까운 교통사고가 일어났다. 부모는 마지막에 딸을 껴안아 지켰고, 결국 생존자는 한 명.

유리였다.

당시 유리는 자신의 실수로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는지, 아예 마음을 닫아버렸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자지도 말하지도 않고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린은 그런 유리의 병문안을 갔다.

“유리야. 유리야! 정신 차려! 유리야!”

너무나도 슬픈 표정에 세린의 충격도 컸다. 다행히 세린의 부모님이 정성껏 유리를 간호한 덕분에 어느 정도 나아졌다.

다만, 유리가 정신을 차리고 처음 한 말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이었다.

“마왕이 엄마 아빠를 데려갔어.”

“숲속에서 곤란에 빠진 요정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도와주자 보답으로 천국으로 데려갔어.”

“사실 엄마 아빠는 천사였던 거야. 그래서 결국 하늘나라로 돌아갔어.”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이야기를 읊기 시작한 것이다. 병원에서는 정신과 치료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망상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 * *

“인정할 수 없었던 거야. 유리는 매일매일 다른 이야기를 했어. 하지만 어떤 이야기든 결말은 엄마, 아빠가 사라졌다는 거였어.”

세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괴인들은… 마치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하지만 본인의 무의식은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결국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 빼고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어. 왜냐하면… 아무도 그걸 믿어주지 않았으니까.”

그야 그렇겠지.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건, 안타깝게 동정의 시선으로 유리를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걸 보다 못한 내가 한 한마디가 지금 같은 상황이 된 거야.”

-유, 유리야! 사실 내가 그런 거야! 나는 나쁜 사람이거든.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는 악의 조직 여왕님이야!

그것이 유리의 망상을 증폭시키는 기폭제였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야기에 호응해 주는 친구의 말을 기점으로 지금의 설정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자신은 굉장히 특이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악의 조직의 보스인 내가 자기를 노렸고, 유리의 부모님은 그런 자신를 지키다가 돌아가셨다.”

“그 굉장한 능력이라는 게… 지구 자전이고?”

“맞아.”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세린은 울먹이면서… 그러면서도 두 주먹을 꼭 쥐고 버텼다.

“미안해. 유치한 연극이었지? 하지만… 하지만 유리에게는 그게 사실이야. 주위 사람들은 바보처럼 보겠지만… 이렇게 해야만 그나마 유리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거야….”

세린은 지금 당장에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피도 눈물도 없는 악의 보스 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거였나….”

“그래, 솔직히… 시영이 네가 어울려줘서 고맙게 생각해… 나… 그 날 이후, 처음으로 유리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모습을 봤어.”

세린은 지금도 유리의 일만을 걱정하고 있다. 사람을 잔뜩 속여 놓고 착한 척하다니. 이 속이 시커먼 녀석 같으니.

하지만… 난 검은색을 좋아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때서야 주위에 있던 괴인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사실 우리는 아주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세린 님이 부탁했어.”

“유리 하나라면 지금까지처럼 세린님 혼자서도 속일 수 있었지만… 네가 있으면 좀 더 그럴싸해야 했으니까.”

그런다고 그런 타이즈를 입고 오면 정말로 속을 줄 알았냐?

“시영야. 미안하지만… 이 일은 비밀로 해주고… 가능하다면 지금처럼… 계속 연극을 해줄 수 없을까?”

그런 귀찮은 일을 시키려고 하다니… 하지만, 나는 전에 유리에게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하기도 했고, 이런 일 따윈 별 거 아니다.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딱 지금 정도의 상황이라면….

“알겠어.”

나는 짧게 대답했고, 세린과 괴인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바로 그 때.

“그게… 무슨 소리야…?”

모두가 등골이 섬뜩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결코 이 이야기를 들어서는 안 되는 한 명의 것이었으니까.

“무슨… 소리… 그건… 거, 거짓.”

녹색 머리띠의 소녀-서유리가 자신의 양 어깨를 감싸 안고 몸을 떨고 있었다.

“서유리!”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반응하지 않고 식은땀까지 흘리며 몸을 떨었다.

“아냐, 나는… 지구를… 엄마랑 아빠는… 세린의 손에… 아니, 잠깐만… 그때는, 나는… 아니. 아니야. 아니야―――!”

그 뒤로,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명이 골목을 가득 메웠다. 바닥에 쓰러진 채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유리, 세린이 당황해서 다가갔지만 유리의 거친 행동에 움직임이 막혔다.

“오지마―!”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유리야! 진정해.”

나와 괴인들은 유리의 팔다리를 잡았다. 옷도 몸도 얼굴로 엉망인 채로 그녀가 난동을 부렸으나, 어떻게든 힘으로 진정시키려고 했다.

“놔, 놔! 날 잡아가지 마! 지구가 멈출 거야! 안 돼! 싫어!”

유리 다음으로 충격을 받은 세린은 멍하니 서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다…. 뭔가 큰일이 날 것 같다.

그때 유리의 팔을 누르고 있던 괴인이 비명을 질렀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악!”

유리가 괴인의 팔을 문 것이다. 동시에 이변이 하나 더 일어났다.

“……읏?!”

느닷없이 나와 세린과 괴인들이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어지럽다고 해야 하나?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기분이 들어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쓰러진 내 시야에 유리가 달리는 것이 보였다.

놓쳤다.

“어… 어, 어떡해… 유, 유리가….”

세린은 공황상태였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았다.

“야, 정신 차려.”

“아, 알아 버렸어. 깨, 깨달은 것 같아. 시영아! 어떡해?!”

그녀는 펑펑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물었다.

아, 확실히… 기억이 난 것 같다. 그러니까 저런 발작을 일으키고 여기서 달아난 거겠지. 정신이 혼란한 상태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한시 바삐 찾지 않으면….

유리의 행방을 쫓던 괴인 하나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라며 곤란해 했다.

“나, 나 때문에. 내가 쓸 데 없는 말을 해서! 내, 내가.”

이쪽도 상당히 심각하다. 따지고 보면 내 책임이다. 내가 진실을 알려고 했기 때문에… 덩달아 유리도 잔혹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 나, 나 때문이야. 유리야. 유리야!”

할 수 없군. 이건 신사의 도리에 어긋나지만.

“야, 윤세린 정신 차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세린의 뺨을 짝! 강하게 때렸다.

“…읏?!”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악의 조직 보스가 겨우 그 정도로 뭘 하겠어? 아니, 그 이전에 친구라면 빨리 유리를 찾으러 가야지!”

“…아. 아….”

그때서야 세린은 조금 정신을 차린 듯하다. 뺨을 때린 건 나중에 사과하고, 지금은 유리의 뒤를 쫓아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세린도 짐작 가는 곳이 없는 모양이다.

유리가 갈만한 곳 …을 나도 알 턱이 없지. 게다가 지금은 제정신이 아닐 텐데.

하지만.

“……!!”

나는 벌떡 일어나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렇구나. 포기할 필요는 없군.

나는 유리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었다.

“따라 와.”

한 소녀가 말하길, 자신은 지구를 자전시키고 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이며, 그 누구보다도 특이한 존재. 그렇기 때문에 악의 조직에 습격당하고, 부모를 잃어버린 것도 큰 힘의 대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전부 망상이긴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방금 전까지도 절대적인 진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환상은 환상일 뿐.

그것이 깨졌을 때 남는 것은 10년 치의 괴로움을 더한 잔혹한 진실.

설령 망상이라도, 거대한 힘을 얻은 대가는 반드시 따르는 법이다. 이래서 거창한 건 싫은 거다.

나와 세린과 괴인들은 유리를 찾아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알아?”

“일단 따라와!”

“……?”

자, 어쨌건 자전소녀랑 결판을 낼 때가 왔다. 나는 초능력자도 아니고, 만화 속 주인공처럼 잘난 녀석은 아니다.

그래도 평소에 겸손하게 살았으니까… 딱 한 번 정도는 주인공처럼 활약해 볼까요?

“하지만, 그 애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세린이 침울한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힘들다. 하지만…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라면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우리가 찾은 곳은… 학교.

거기에 있는 거니?

나는 옥상을 올려다보았다. 세린과 괴인들도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따랐다. 그리고… 옥상 끝에 서있는 유리를 발견했다.

“모두, 혹시 모르니까 여기서 기다려.”

옥상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불안하니까.

세린과 괴인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달렸다. 숨도 쉬지 않고 한 층 한 층 계단을 올라, 단숨에 옥상까지 다다랐다.

무기질적이고 육중한 회색빛 철문.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에 손을 댔다. 끼익. 문이 열리고… 저녁노을을 등진 채, 옥상 끄트머리에 한 소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

“…….”

녹색 머리띠의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를 등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위험할 것 같다. 세린과 괴인을 일부러 밑에 두긴 했지만 떨어지는 사람을 받을 수 있을까?

옥상이라면 펜스라도 설치해두라고 빌어먹을 학교.

“저기….”

“가까이 오지 마!”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유리가 소리쳤다.

이건 역시 위험하다.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다. 나는 일단 시키는 대로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전부… 기억나버렸어.”

교통사고, 부모님의 일, 세린이의 일, 자신의 망상.

“나는 어째서 그런 터무니없는 망상을 한 걸까…?”

유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펼쳤다. 그것은 10년 동안 그녀가 생각하는 유일한 친구였으며, 망상의 밑바탕이 되는 저주스러운 물건.

그녀는 느닷없이 책장을 움켜잡고 찢기 시작했다.

“전부! 전부! 전부 거짓말! 망상이잖아!”

찢겨진 책장을 던지자 바람을 타고 팔랑팔랑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녀는 책장을 모두 찢어버리고 남은 커버도 버려버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하… 하하. 하. 나는 다른 사람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그래서 세린이의 말에 안도하고…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바보 같아.”

유리는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심장이 덩달아 지끈 거린다.

“나… 한심하지?”

“…….”

지구를 자전시키는 소녀가 허탈하게 물어왔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설픈 위로가 통할 상태가 아니다.

“힘들어. 다… 싫어.”

유리는 이번엔 웃기 시작했다. 자조가 잔뜩 섞인… 미소라고도 부를 수 없는 표정으로.

위태위태하다. 어떻게든 말리지 않으면 우려했던 일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

“유리야 일단 진정하고 내 말좀….”

“제발 위로하지 마!”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얼마만큼의 절망을 담고 있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 순간 조금 강한 바람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른 탓에 유리의 몸이 균형을 잃어버렸다는 거다.

“……?!”

“……!!”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유리가 비틀 하고… 발을 헛딛고 그대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모순되었지만, 소녀-서유리는 갑작스런 상황에 냉정을 되찾았다. 부유 감각과 함께 발에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황.

즉,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가의 눈물이 방울방울, 자신 보다 위쪽에서 춤춘다.

‘…아.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 구나….’

자살을 생각했는지 안했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다만, 무의식 중에 학교 옥상을 선택했다는 것은 내면 한 구석에 이렇게 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전부 망상이었다.

자신만을 위한 망상이었고,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기분이겠지. 다른 사람들은 힘든 건 아주 잠깐이라고 말할지 모르나, 잠깐이라도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아픔은 결국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엄마 아빠… 미안해요….’

소녀는 눈을 감았다.

‘세린아…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마지막으로.

한 달 전부터 알게 된 소년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자신은 그 소년이 초능력자라고 생각했다.

모든 게 망상이었다면, 이 망상을 한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아마도 자신은 외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동류를 찾는다고 하고 한 소년에게 억지로 자신의 망상을 밀어 붙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달은 꽤 즐거웠다.

단순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이런 괴상한 상황에 휘말렸으면서도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그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소년은 늘 자신과 함께해주었다.

책을 손에 잡고 있으면서도 늘 마음은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소년을 만나 후로 책읽는 시늉을 했지만, 실제로는 한 글자도 못 읽었다는 것은 비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소녀는 자신만을 위한 망상으로 소중한 친구와 소년을 끌어들여 상처만 입혔다.

‘시영아….’

차마 감사의 인사도, 사죄도 할 수 없었다.

어쨌건 이걸로 모두 끝이다….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젠장! 눈 떠, 서유리―――――!”

폼 잡는 건 이런 게 아닐 텐데.

나도 모르게 옥상에서 유리를 향해 뛰어들고서야 가볍게 후회해보았다.

그녀는 다 포기한 듯이 눈을 감고 있었고, 애써 힘냈더니 나를 봐주지 않는 게 열 받아서 눈뜨라고 소리쳤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옥상 끝에서 아래쪽으로 힘껏 도약한 덕분에 금방 유리에게 닿았다.

“…어째서?!”

유리의 놀라는 표정과 목소리.

하지만 그게 어쨌건 나는 그녀를 안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한 없이 작고 가녀린 소녀의 몸이었다. 학교는 5층. 게다가 보통 건물보다 높기에 떨어지면 골절 정도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 뭐하는 짓이래?’

이럴 땐 정말 초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건 그냥 바람일 뿐이다.

자, 그럼 할 수 없지.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주인공 티를 내볼까?

나는 유리를 강하게 끌어안고 그녀의 머리를 감쌌다. 떨어지는 건 내가 먼저. 그것이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바로 눈 아래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세린과 괴인들이 있지만 도움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 것 같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땅.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다가올 충격에 대비… 어라?

갑자기. 몸에 기묘한 부유 감각이 느껴진다. 떨어지는 것과는 다른 누군가 가볍게 받아드는 느낌.

그리고 그것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나는….

“어? 라? 라?”

고개를 갸우뚱하며… 천천히 바닥에 착지했다.

상처하나 없이 말이다.

“……?”

나, 유리, 세린, 괴인들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었다.

한동안 침묵이 일대를 지배했다.

“……아?”

자, 잘 모르겠지만….

“사, 살았다…!”

온몸에 한기가 든다. 지금 방금 나는 분명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것이다. 내가 안도하고 있었을 때, 유리가 내 양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시영아 괜찮아?!”

놀란 눈으로,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가 물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일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다.

“어? 어.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정말 초능력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 내게 한해서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다, 다행이야!”

유리가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와락 껴안았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말… 정말… 핫?”

그녀는 몇 번이나 ‘다행’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이 나를 황급히 밀어냈다.

“대체 왜 그랬어?! 정말 죽으면 어쩌려 그래? 부모님도 그렇고… 시영이 너마저 잘못되면 나는… 나는…!”

이번에는 울면서 화낸다.

이렇게 표정 변화가 많은 아이였구나.

“왜 나 같은걸 구하려고 이런 위험한 짓을 한 거야! 알잖아! 나는 한심한 멍청이라고! 나는 그냥 죽는 게 낫다… 꺅?!”

나는 쓸 데 없는 소릴 하려는 유리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이런 건 굳이 폭력에 들어가지 않겠지.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랬다가는 천국에 계신 너희 부모님이 슬퍼하신다고.”

나는 일부러 이 이야기의 원점이 되는 사건을 얘기했다. 다시 말해 그녀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

그것 때문인지 유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부모님도 분명 나를 한심한 애라고 생각할 거야…. 경멸하고 욕하고 있을 거야!”

“아니, 절대로 그럴 리 없어.”

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확고하게 부정했다. 그런 내 태도에 유리는 말을 잃은 듯했다.

“너희 부모님은 늘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고. 언제나 혼자 있는 걸 안타까워하고, 그 사건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슬퍼하고 있어.”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뭐, 일반적으로도 자식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좋아하는 부모는 거의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나는 손을 뻗어 유리의 녹색 머리띠에 손을 댔다.

“너, 그 머리띠… 어머니 거구나. 어쩐지 조금 낡아 보인다 했어.”

“……?!”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초능력자가 아니며, 초능력이 각성할 리도 없다. 그런 건 지나치게 특이하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검은테 안경을 쓰시고, 올백머리를 하신 분이고.”

왜냐하면….

“두 분이 안부 전해달래. 부디 예전처럼 밝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한대.”

왜냐하면….

‘영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특이하다고 생각하니까 말이다.

유리의 두 눈이 떨렸다.

내 말의 뜻을 이해했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유리는 아주 잠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가 빙긋 웃어보이자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 눈물에 담긴 감정은 한둘이 아니라 모두 설명할 수 없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이제 유리에게 지구를 자전시키는 능력 같은 건 필요 없다는 것 말이다.

시영(視靈)이라는 이름 때문인지는 몰라도 내겐 태어날 때부터 영능력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강하진 않다. 보통사람보다 영감이 조금 뛰어난 정도. 그래서 시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오래 걸렸던 것이다.

두 사람, 그러니까 유리의 부모님은 영능력이 있는 내게 딸을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 정도로 능력이 강하진 않아서 온힘을 다해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한테는 반대로 내가 유리를 힐끔힐끔 바라 보고 있다는 오해를 샀지만, 덕분에 그녀와 가까워졌으니 상관없나?

나는 유리의 등 뒤쪽을 바라보았다.

흐릿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실루엣. 한사람은 녹색 머리띠를 한 여성, 또 다른 한 사람은 검은테 안경을 쓴 올백머리의 남성.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것은 당신들이었군요. 딸아이를 도와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죠?’

두 사람은 빙긋 웃으면서 천천히 사라졌다.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딸아이 뒤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뭐, 아무튼 성공이에요. 덕분에 유리가 옥상에 있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제 편안히 잠드시길.

지구는 오늘도 아무 일 없이 돌아갈 테니까요.

* * *

시영과 유리가 옥상에서 땅에 무사히 착륙하고, 이런저런 문제가 해결되었을 무렵. 학교 담 쪽 정원수 한쪽에서 소년이 하나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큰일 날 뻔했네.”

소년은 일부러 가운데 손가락만 써서 안경을 고쳐 쓰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애용하는 캔커피를 홀짝이며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려고 하던 찰나.

-위이이이잉. 위이이이잉.

핸드폰이 울렸다. 소년은 커피 캔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러나 캔은 떨어지지 않고 공중에 멈춰있었다. 그 상태로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찾아 받았다.

“아, 네 여보세요. 국장님.”

전화기 안쪽에서 무어라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네, 감시대상 'Rotation Girl'은 무사합니다. 긴급 상황이라 허가 없이 ‘힘’을 썼습니다. 사건 발생 약 15분 전, 전 세계적으로 발생한 미진(微震)은 감시대상의 힘이 폭주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일 겁니다.”

소년은 간단히 경과를 보고했다.

“어찌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 친구 하나가 일을 해결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감시대상은 자신의 능력을 망상이라고 생각해버린 모양입니다. ‘망상을 진심으로 믿는 데서 획득한 능력’인데, 그것을 부정한 시점에서 아마도 능력은 소멸되었을 것으로… 네? 아직이라고요? 잠깐만요. 그건 더 위험하지 않습니까? 장난삼아서라도 ‘지구의 자전을 멈춰볼까?’라고 생각했다간… 네?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뵙겠습니다.”

소년은 통화를 끝내고는 공중에 놓인 캔커피를 다시 집어 마시며 중얼거렸다.

“어이구, 끝인 줄 알았더니 이제부터 시작이네.”

* * *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나는 핸드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평소와 다름없이 기지개와 하품. 그리고 등교 길에 나섰다. 그동안은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 혹은 등교 전 추격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이르게 나섰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딱, 지각을 모면할 시간에 등교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 앞을 나섰을 때.

바로 문 옆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녹색 머리띠를 하고 책을 든 소녀였다.

“서유리?”

“…안녕?”

유리는 책을 보다가 나를 보고는 아주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유리가 웃는 거 처음 본다. 나는 멋쩍음을 감추고자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어? 우리 집을? 어떻게?”

도망치더라도 늘 갈림길에서 헤어졌는데. 내 질문에 새로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내가 알려줬어.”

“윤세린! 우리 집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야 반장이니까.”

세린은 우하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말했다.

음… 이쪽도 만만치 않게 귀엽… 이 아니라. 아침 등교 길에 집 앞에서 두 명의 미소녀가 기다리는 건 너무 특이하다고.

아 그것보다.

“두 사람 같이 온 거야?”

내 질문에 유리와 세린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생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내 쪽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일이 해결되었으니까… 두 사람도 결국 친구로 돌아온 것이다. 잘됐네, 잘됐어.

“그래서 무슨 일?”

“새롭게 다시 인사하려고 왔어. 아, 먼저 이거 받아.”

세린은 그러면서 내게 작은 종이조각을 건네주었다.

이건 명함인가?

“응?”

그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계정복을 노리는 악의 조직 핑크팬더. 암약부대 한시영.’

내 명함이라고?

아니 잠깐만요. 세린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네 능력은 비밀로 해줄게! 대신 내 밑에서 일 해줘야겠어.”

“그건 그냥 연기하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릴. 유리를 위한 것도 있긴 하지만, 진짜 꿈이기도 해. 영능력이라니… 악의 조직에 한둘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잖아?”

“아니, 아니. 그런 악의 조직 들어본 적 없어! 게다가 그다지 세계정복에 도움 될 것 같지도 않고. 것보다 유리 너는 왜 그런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유리는 조금 기쁜 표정으로 작은 종이조각-명함을 들어보였다.

“나도 가입했어.”

“너도, 세계정복이냐?!”

“그야… 오랫동안 날 위해 노력해준 친구의 일이니까.”

훈훈한 것 같지만 뭔가 미묘하게 달라! 두 사람이 다시 우정으로 맺어지긴 했는데, 역시 뭔가 훈훈하지 않아!

“그런 고로.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

“난 한다는 말 안했어! 웃, 파, 팔짱은 치사해!”

거부하려는 내게 세린이 은근슬쩍 육탄공격을 해왔다. 내 팔꿈치가 그녀의 가슴에 닿았다. 이 녀석 분명히 알면서 이러는 거다.

“응? 뭘 말이야? 팔짱이 좋아?”

“파, 팔짱이라기보다 그것이….”

그렇게 옥신각신하는 나와 세린의 모습을 보고, 유리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서유리가 말하길, ‘바람둥이는 죽인다.’ ”

“자기 명언을 말했어?! 게다가 명언을 말하는 척하면서 단순히 살인예고를 한 것 같은데?”

유리는 뭔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유리야. 시영아 학교 늦겠다. 어서 가자!”

세린이 이 상황에서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지극히 상식적인 말을 했지만, 유리의 눈은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내가 안절부절 못하고 있자, 유리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각오를 다진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선 내 오른쪽으로와 세린이 한 것처럼 팔짱을 꼈다.

“윌리엄 콩그리브가 말하길 ‘사랑이 변해 생긴 증오처럼 맹렬한 것은 하늘 아래 없으며, 또한 경멸당한 여성의 분노처럼 격렬한 것은 지옥에서조차 없다.’ ”

“잘 모르겠지만 무서워 서유리!”

티격태격 등교 길이 계속 된다.

약하긴 해도 영능력은 역시 굉장한 거에 속하겠지. 그리고 그 대가는 이런 거다. 뭔가 무섭다고.

뭐라고? 이런 걸 행복한 고민이라고 한다고?

음….

…뭐, 확실히 그럴 지도 모르겠다.

누가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표정변화 없고 아무 하고도 관계를 맺지 않으려고 했던 자전소녀의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는 걸로 만족하기로 할까.

하늘을 보니 오늘도 태양이 떠오르고 있다.

즉, 오늘도 지구는 돌아간다.

?
  • ?
    카미냥 2016.10.20 16:59
    소설본... 만화는 정말 인상깊게 봤습니다. 소설 버전도 있을거라고는 기대안했었는데 저는 운이 좋네요
  • ?
    신념군 2016.10.20 17:14
    네, 사실 소설버젼도 있었던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작품목록

망하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갱신 될 겁니다.

  1. 동방유희령(東方遊戱令) 24 file

  2. 자전소녀(Rotation Girl)-소설Ver 2 file

  3. 베르로랑 이야기 외전 : 천칭의 분기점 0 file

  4. 동방환마경(東方幻魔鏡) 4 file

  5. 동방유성야(東方流星夜) 17 file

  6. 동방몽상화(東方夢想花) / 절판 4 file

  7. 예지나의 환상즉흥곡 / 절판 5 file

  8. 자전소녀(Rotation Girl)-만화Ver 2 file

  9. 크로싱하츠(Crossing Hearts) / 절판 0 file

  10. 베르로랑 이야기 5 : 천사가 꿈꾼 내일(완결) 0 file

  11. 베르로랑 이야기 4 : 저주받은 동화 0 file

  12. 베르로랑 이야기 3 : 스물두 번째 인형 0 file

  13. 베르로랑 이야기 2 : 그림자 공주 2 file

  14. 베르로랑 이야기 1 : 바보 고양이의 꿈 0 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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